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셀레우코스 전쟁 (문단 편집) == 결과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터키 갈라티아 4.png|width=100%]]}}}|| 기원전 188년 아파메이아 평화 협약으로 로마 공화국의 동맹인 페르가몬 왕국과 로도스를 중심으로 재편된 아나톨리아 반도 기원전 188년에 체결된 아파메이아 평화 협약의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1. 셀레우코스 제국은 트라키아와 타우루스 산맥까지의 소아시아를 포기한다. 다만 시리아와 직접 접해있는 킬리키아는 칼리카드노스 강까지 제국의 소유로 남는다. >2. 셀레우코스 제국은 로마 공화국의 동맹국에게 해를 끼치는 외교 정책을 벌일 수 없다. >3. 셀레우코스 제국은 로마 공화국에 은 15,000달란트를 배상금으로 지불해야 한다. 2,500달란트를 즉시 지불하고, 남은 돈은 12년 동안 나누어 지불한다. >4. 셀레우코스 함대는 10척으로 제한하며, 사르페돈 곶까지만 항해할 수 있다. 또한 [[전투 코끼리]]를 소유할 수 없으며, 갈라티아 용병을 고용할 수 없다. >5. [[한니발 바르카]] 등 로마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인도하며, 안티오코스 3세의 막내 아들인 [[안티오코스 4세|안티오코스]]를 로마에 인질로 보낸다. >6. 페르가몬 왕국은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결정적인 기여를 한 점을 인정하여 리카오니아 전체, 프리기아, 무시아, 리디아, 이오니아, 시필루스, 카리아 지방, 마이안드로스 강 유역에 걸치는 소아시아 영토를 가진다. >7. 로도스는 해전에서 지대한 공헌을 한 점을 인정하여 리키아와 카리아 남부를 수여받는다. >8. 전쟁 이전이나 전쟁 중에 로마와 동맹을 맺은 소아시아 도시국가들은 독립을 유지한다. 이리하여 셀레우코스 제국은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아나톨리아 반도의 주요 영토 대부분을 포기해야 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배상금을 마련하기 위해 제국 각지를 돌며 여러 신전들을 털어갔는데, 이로 인해 패전으로 뒤숭숭한 민심이 더욱 악화되었다. 여기에 기원전 210년 안티오코스 3세의 동방 원정 때 일시적으로 복종했던 [[아르메니아 왕국|아르메니아]], [[파르티아]], [[박트리아]] 등도 모두 독립을 선포했다. 이에 안티오코스 3세는 다시 동방 원정을 떠나기로 하고, 기원전 187년 원정군을 꾸려 셀레우키아를 출발했지만, [[자그로스 산맥]]의 바알 신전을 약탈하던 중 암살자의 습격을 받고 살해되었다. 이후 그의 후계자들인 [[셀레우코스 4세]]와 [[안티오코스 4세]]는 제국의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했지만, 안티오코스 4세의 사후에 벌어진 내전이 장기화되면서 셀레우코스 제국은 급격하게 쇠락했다. 반면 페르가몬 왕국의 에우메네스 2세는 로마 공화국이 셀레우코스 제국으로부터 소아시아 영토 대부분을 뜯어낸 뒤 자신들에게 넘겨준 덕분에 소아시아의 최강국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비티니아 왕국]]의 국왕 [[프루시아스 1세]]는 페르가몬 왕국과 적대 관계를 형성하는 한편, 한니발 바르카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한니발은 훗날 로마군에 대항하여 자신의 군대를 육성할 수 있도록 비티니아군을 강화시키기로 마음먹은 후, 프루시아스 1세가 이웃 왕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한니발은 해군을 이끌고 페르가몬 왕국의 함대와 교전했다. 그는 모든 종류의 파충류들로 가득찬 도자기 그릇들을 페르가몬측 전함에 던져 적을 혼란에 빠뜨린 뒤 맹공을 퍼부어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에우메네스 2세는 로마 원로원에 사절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며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했다. 기원전 181년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이끄는 로마 사절단은 비티니아에 방문해 양국의 분쟁을 해결했다. 이때 플라미니누스는 한니발이 아직 살아있는 것에 분노하여 로마에게 가장 큰 해악을 끼친 숙적을 은닉한 것에 비난을 퍼부었다고 한다. 결국 비티니아 왕은 로마인들에게 한니발을 넘겨주기로 했고, 한니발은 자신을 잡으러 사람이 왔다는 걸 알게 되자 평소 소지하고 있었던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한편, 그리스의 아카이아 동맹은 로마-셀레우코스 전쟁에 참전한 결과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통일을 완성했고, 로마에 굴복한 아이톨리아 동맹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동맹들은 로마가 구축한 체제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외교 정책을 독자적으로 수립하는데 많은 장애가 있었다. 이후 로마의 간섭이 갈수록 심해지자 두 세력 모두 로마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훗날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발발하자 로마군에 맞서 싸우는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의 국왕 [[페르세우스(마케도니아)|페르세우스]]를 은밀히 지원했다. 로마는 이 일에 경각심을 품고, 그리스를 향한 전쟁을 지속적으로 감행해 모조리 복속시킨 뒤 직접 지배 방식으로 전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